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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래 쓴 물건 정든 이야기

by wjrqntla 2026. 9. 21.

 

 

집 안에서 제일 오래된 물건이 뭐냐고 물으면, 아마 대부분은 '그냥 원래 있었던 것'처럼 생각할 거예요. 저도 그랬거든요. 그런데 문득, 오래 쓴 물건에 정든다는 게 어떤 건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어요. 제가 얼마 전에 10년 넘게 쓴 낡은 커피포트를 바꾸면서 이걸 실감했지 뭐예요.

새것 같던 물건, 어느새 추억이 되다

커피 한 잔의 의식

매일 아침이면 습관처럼 커피포트 버튼을 눌렀어요. 물 끓는 소리,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모습까지. 그게 제 하루의 시작이었거든요. 처음엔 ‘빨리 물 끓여주는 편리한 도구’였는데, 어느새 그 소리가 익숙해지고, 커피포트 자체가 그냥 제 아침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거죠.

 

가끔은 물을 끓여놓고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기도 했어요. 그냥 아무 생각 없이, 물방울이 춤추는 걸 보면서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는 기분이었달까요.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서 ‘나만의 의식’처럼 된 것 같아요.

손때 묻은 흔적들

물론 새 제품처럼 반짝거리지는 않았어요. 손잡이 부분은 이미 닳아서 매끈해졌고, 여기저기 흠집도 많았죠. 특히 오래 쓰다 보면 생기는 하얀 물때는 아무리 닦아도 없어지지 않더라고요. 처음에는 ‘아, 이제 바꿔야 할 때가 됐나’ 싶었는데, 시간이 지나니까 그 흠집이며 물때까지도 괜히 정겹게 느껴졌어요. 마치 제 손때가 묻은 흔적 같달까요.

 

어떤 물건들은 디자인이 예뻐서, 어떤 물건들은 기능이 좋아서 사잖아요. 그런데 오래 쓰다 보면 그런 이유들은 희미해지고, 그 물건과 함께한 시간들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. 저한테 그 커피포트가 그랬어요.

바꿀까 말까, 수십 번 고민했던 순간

새것의 유혹

사실 바꿀까 말까 고민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. 마트에 갈 때마다 예쁘고 기능 좋은 새 커피포트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. ‘이걸로 바꾸면 물도 더 빨리 끓을 텐데’, ‘디자인도 훨씬 예쁘고’, ‘온도 조절 기능까지 있는 걸로…’ 하면서요. 매번 똑같은 고민을 반복했죠. 그래도 결국엔 ‘아직 쓸 만하니까’ 하고 다시 돌아오곤 했어요.

고장 난 척, 무심한 척

가끔은 일부러 버튼이 잘 안 눌리는 척도 해봤어요. 아니면 물이 끓다가 갑자기 꺼지는 척. ‘이제 정말 수명이 다했나?’ 싶어서 슬쩍 불안감을 조성했달까요.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척만 하면 또 멀쩡하게 작동하더라고요. 정말 얄미울 때도 있었지만, 한편으로는 ‘그래도 아직 나랑 같이 가고 싶다는 건가’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. 그럴 때마다 괜히 미안해져서 더 애지중지하게 됐죠.

결국, 떠나보내는 날

결정적인 순간

결국 커피포트를 바꾸기로 결심한 건, 정말 아무 이유 없이 고장이 났기 때문이에요. 아침에 버튼을 눌렀는데, 아무 반응이 없는 거예요. 멍하니 바라보다가 ‘아, 진짜 끝이구나’ 싶었죠. 그 순간, ‘새 거 사야겠다’는 생각보다 ‘이제 이걸 못 쓰는구나’ 하는 아쉬움이 먼저 들었어요. 10년 넘게 내 아침을 책임져 줬는데, 이렇게 갑자기 떠나보내야 한다니.

새 주인 맞이할 준비

그래서 새 커피포트를 사러 가기 전에, 낡은 커피포트를 깨끗하게 닦아줬어요. 평소에 잘 닦지 못했던 틈새까지 꼼꼼하게요. 마치 오랜 친구를 배웅하듯, 마지막으로 정성껏 닦아주고 싶었거든요. 예전처럼 반짝거리진 않았지만, 그래도 왠지 모르게 흐뭇했어요. 잘 썼다는 인사라도 해주는 기분이었달까요.

정이라는 것

새 커피포트는 확실히 좋아요. 물도 빨리 끓고, 디자인도 예쁘고.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익숙했던 물 끓는 소리가 가끔은 그립더라고요. 그리고 왠지 모르게 제 손에 닿던 낡은 커피포트의 감촉이 더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요. 물건에 정든다는 게 이런 건가 봐요. 단순한 기능이나 편리함 너머에, 함께한 시간들이 쌓여서 생기는 그런 마음 말이에요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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